다들 그런 말 하잖아. 대학 가서 사귀는 친구들은 다 비즈니스 관계라고. 나는 한 때는 '그런게 어딨어, 마음 맞으면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는거지' 라고 생각했었어. 근데 웃긴 게 이미 그 생각은 내 머리 깊숙히 박혀서, 조금씩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물들어가더라. 과에서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그중에서는 먼저 나서서 날 챙겨주는 친구도 있었고, 내가 연락을 잘 안해도 늘 웃는 얼굴로 반겨주면서 장난도 쳐 주는 친구들도 있었어. 동아리는 더 좋았어. 나보다 나이 많은 형 누나들도 엄청 친근하게 잘해줬고, 나랑 비슷한 시기에 들어간 동기들은, 아니 걔네는 완벽하다시피 한 친구들이었지. 그래 친구. 힘들 때 함께 버티고 즐거울 때도 같이 즐길 수 있는 그런 친구. 그랬었어.
근데 내가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기반이 훤히 드러나더라. 옛날에 생각하던 친구의 의미는 온데간데 없고, 단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친목을 다져놓은 관계. 그걸로 정의되어버린거야. 그 이익이 돈이던, 과시용 인맥이던, 같이 있으면 재밌을 수 있는 친구던, 내가 힘들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던. 학과 친구, 동아리 친구, 심지어 동네 친구들까지. 모두 저울질을 하게 되어버린거지.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이점과 내가 그 사람에게 주는 부담감이 계속해서 저울질이 돼. 한번 저울질이 시작되니까 모든 게 저울 위에 올려지지.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도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노력. 너에게 있어 내가 갖는 가치. 그리고 그 반대편엔 내가 빼앗는 너의 시간. 나라는 존재가 너에게 주는 귀찮음. 내가 너희에게 가하게 되는 부담감의 총량. 조금이라도 더 타인에게 가치있어지고 싶어서 나는 내 힘든 걸 숨겼어. 그리고 너희에게는 가치있는 사람이고 싶어서 발버둥치게 되고, 계속해서 가치를 확인하려 들어. 그렇게 매 순간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거든. 그런 거 있잖아. 분명 동등하다고 생각되던 관계였는데, 알고 보니 나 혼자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는 그런 관계. 그런 꼴만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어. 그런 순간이 닥치게 된다면, 내가 너희에게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되어서 폐기처분되어버릴까봐. 대가리가 이렇게 돌아가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절대 너를 찾지 않으려 하게 되면서, 모순적으로 너는 계속 무슨 일이 생길 때 마다 나를 찾아주었으면 하게 되더라. 도대체 내가 뭐라고, 뭐든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아니면서. 정작 제 앞가림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내가 짊어지는 짐은 늘어나고, 말은 없어졌지. 이쯤 되면 스스로가 감정 쓰레기통이 되길 자처하는 것 같기도 해. 정작 안에 내용물이 얼마나 차든, 속에 벌레가 끓든 상관없이 비워질 일은 없고 계속해서 쑤셔넣기만 바라는 쓰레기통. 뭐 넣다보면 언젠간 터지겠지. 부디 터져서 쓰레기통 또한 치워야 될 쓰레기더미가 되기 전에 잘 비우는 방법을 찾아내야 할 텐데 말야.
무서워. 내 곁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까봐.
무서워. 내가 아무 쓸모도 없어질까봐.